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모즈루 사건 (문단 편집) == 사건 == 이 와중에 1934년 2월 [[경순양함]] 타츠타(龍田)를 [[기함]], 치도리급 수뢰정 1번함 치도리(千鳥), 2번함 마나즈루(眞鶴), 3번함 토모즈루(友鶴)로 하는 [[사세보시|사세보]] 경비대 제21수뢰대가 편성되었다. 제21수뢰대는 1934년 3월 12일 오전 1시, 폭풍우를 무릅쓰고 사세보항의 테라섬(寺島)에서 출항해 치도리, 토모즈루의 순서로 오타테섬(大立島) 남쪽 바다로 나아가 기함 타츠타와 연습전투 훈련을 진행했는데, 점점 풍랑이 거세졌다. 오전 3시 25분 훈련을 종료하고 타츠타와 휘하 함대가 사세보로 귀항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풍량이 거센 탓에 함이 점점 더 심하게 동요하고, 3시 58분에는 토모즈루가 무전 불능상태가 되어 서로 발광신호로 연락을 유지하였다. 그로부터 14분 뒤인 4시 12분에 토모즈루에서 발광신호마저 끊어지자, 다른 함선들은 즉시 토모즈루가 실종된 지점으로 돌아가 높은 파도 사이로 탐조등을 비췄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전 7시 45분에 토모즈루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판단, 제1보를 발령했다. 타츠타는 기상이 악화되고 파도가 높아져 더 이상은 탐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오전 9시 45분에 임시 정박지에 입항했다. 11시 12분 타츠타는 탐색을 재개했으며, 사세보 진수부 소속 함선의 각 수상기들도 제21구축대와 함께 근해를 수색하였다. 제1보가 발령된 지 7시간 20분만인 오후 2시 5분에야 전복된 채로 표류 중인 토모즈루를 발견하였다.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을 준비하는 도중 생존자 2명이 해수면 위로 올라온 모습을 타츠타의 승조원들이 목격했지만, 이들은 바로 가라앉아 실종되었다. 구조된 승조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혹시 잘못되면 사세보에 있는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외부인원과 접촉을 시도한 인원으로, 탈출하는 중 시간을 너무 지체하여 체력이 다 떨어져 가라앉았다고 추정되었다. 여하튼 이들 때문에 배 안에 생존자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토모즈루 발견 30분 후 오후 4시 26분, 타츠타가 토모즈루를 예항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예항용 밧줄이 절단되어 교체하는 데 시간을 소비했지만, 이튿날 오전 7시 15분 사세보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입항 후 생존자 위치를 확인하고 함체를 부상시킨 뒤, 생존자 반응이 있던 제4병사실로 잠수부가 공기를 보냈다. 오후 8시에 도크에 입거시켜 배수시킨 후, 배 밑에 직경 50cm로 구멍을 뚫었다. 구조원은 구멍에 뛰어들어 겹겹히 쌓인 시신들 사이에서 생존자를 구출했다. 구조작업 중에 자력으로 탈출한 인원도 있었다고 한다. 정원 113명 중 생존자는 13명이었으며, 정장 이와세 오쿠이치 해군 [[소좌#s-1|소좌]] 이하 100명이 사망, 실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